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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나무를 북극 스타일로
아빠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비 온 다음 꽃밭을 거닐고, 부서지는 파도에 발을 적시는 것만큼 우리 집 발코니에서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는 걸 즐긴단다. 커피 향이 안겨주는 따스함은 사계절 동안 늘 한결같거든.
워낙 커피가 매력적이라 많은 사람들이 아빠처럼 커피를 즐기고 있어. 커피를 판매하는 카페도 해마다 늘고, 커피 맛을 위해 노력하는 로스터와 바리스타들도 늘고, 일하기 위해서라도 커피 없이는 죽고 못 산다는 사람들도 늘고 있지. 정말 어마어마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커피를 마시고 있단다. 아, 그것도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세계적인 수준이란다. 유럽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랍 사람들은 술 대신 커피를 마셔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스물다섯 잔씩 마신다더라. 어마어마한 거지. 아마 하루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이 마시는 커피만 모아도 호수 하나는 거뜬히 만들걸?
그래서 그런지 커피 덕에 지구 전체가 난리야. 사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데 필요한 게 너무 많거든. 특히 외출해서 마시는 커피들은 더욱 그래. 플라스틱으로 된 휴대용 커피잔부터 빨대, 냅킨까지 필요하니까. 하루에 쏟아지는 플라스틱들만 모아도 호수 두 개 정도는 거뜬히 만들걸?
아빠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커피 하나만 하더라도 매일매일 호수가 몇 개씩 만들어지다 보면 커피나무가 디디고 있을 땅까지 모자라게 되는 날이 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아빠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누군가가 그런 이야길 해주긴 했어. 네가 아빠만큼 자라기 전에 지구의 날씨가 먼저 변할 거라고. 그래서 커피나무를 심을 수 있는 곳도 줄어들고, 맛도 바뀔 거라고. 아, 네가 이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을 하니 아빠는 괜히 슬퍼지는구나.
이런 우울한 이야기보단 아빠가 커피를 가장 맛나게 즐겼던 날의 이야기를 해줄게. 아마 네가 딱 좋아할 만한 이야기일 거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이야기에는 북극곰도 나오고, 펭귄도 나오고, 오로라도 나오거든. 어때? 기대되지? 맞아, 아빠도 그날은 꽤 흥분되었거든.
그땐 아직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였어. 엄마와 아빠는 네가 세상에 찾아왔을 때 입으면 좋을 것 같은 옷들을 고르고 있을 때였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해. 마트에서 고른 옷인데, 네게 어울릴 법한 귀여운 펭귄이 그려져 있었어. 그래, 팔이 짧은 그 펭귄 때문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마트에서 돌아와 컴퓨터를 켜려고 서재로 들어섰는데, 아빠 자리에 북극곰이 앉아 있더라고.
“안녕?”
“어, 그래, 안녕?”
정말 놀라서 입이 절로 벌어지더라. 아빠의 컴퓨터 책상과 의자가 그렇게 단단한 줄 몰랐거든. 북극곰이 앉아서 의자를 뒤로 젖혀도 부서지지 않더라니까? 그 사실에 일단 한번 놀라고, 뒤늦게 문을 잠가둔 집에 북극곰이 제 발로 들어왔단 사실에 또 놀라고, 겨우 정신을 차릴 때쯤, 북극곰이 한국말로 내게 먼저 인사를 했단 사실을 알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할 뻔했지.
“넌 나를 봐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구나?”
“아니, 너무 놀라서 그래. 미안한데, 바지 좀 갈아입고 와도 될까?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실례를 했나 봐.”
아빠가 북극곰과는 첫 만남이었지만, 그다지 신사다운 인상을 주진 못했던 거야. 그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다행히 북극곰은 아빠보다 훨씬 신사답더라고 바지를 갈아입고 다시 나타날 때까지 얌전히 제자리에서 기다려줬거든.
“음, 그럼, 우리 커피라도 한잔할까?”
“좋지. 난 카푸치노로 부탁해.”
“넌 북극에서 왔지만 이탈리아식이구나?”
“응, 아메리카식은 나랑 뭐든 여러모로 맞지 않아서. 뭐, 괜찮은 건 코카콜라 정도지.”
정말 유쾌한 곰이었어. 그리고 함께 나눠마신 커피는 아빠 인생에서 최고의 커피였어. 그날따라 향도 깊었고, 신맛도 적절했거든. 뭐, 내가 만든 카푸치노가 북극곰 입에 정말 잘 맞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참,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네가 여독으로 피곤할까 싶어서 나름의 배려지.”
“넌 경상도 사람이지만 충청도식이구나?”
정말 나보다 훨씬 더 농담을 잘하더라니까? 느긋하게 툭툭 던지는 말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어. 말문이 막혀서 애꿎은 커피만 홀짝였지.
“사실 여행 중이야. 세계를 돌면서 글쟁이들을 만나보고 있어. 꽤 피곤한 일이긴 해.”
“그래?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온 거 같은데? 기왕 힘들여서 세계를 여행하는 건데, 노벨상 수상자나 후보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명예로운 작가분들을 찾아가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일단 넌 북극의 아이콘, 북극곰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슈퍼스타라면, 난 널 쫓아다니는 사생팬의 손톱에 낀 때 정도라고나 할까?”
“아, 그건 내 투자 스타일이 단기투자가 아니라 장기투자라서 그래. ‘오늘 당장’을 보기보단 ‘내일’을 보고 베팅하는 중이거든.”
북극곰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대꾸를 했어. 하긴 북극곰이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그 먼 길을 여행해서 오진 않았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여긴 북극곰이 머물기엔 너무 더운 곳이니까.
“내년이면 아이가 태어난다고?”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것보단 내년에 태어날 너의 자식은 이렇게 멋진 카푸치노를 평생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
맞아, 아빠에게 커피나무 재배지가 줄어들고 있단 사실을 알려준 건 아빠보다 훨씬 똑똑한 북극곰이었어. 정말, 굉장히 똑똑하더라고. 본격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이야길 시작하는데, 글쎄, 안경까지 쓰더라니까? 난 정말 어디 교수님인 줄 알았잖아.
“그러니까 당장 재활용을 하고 탄소를 줄이지 않으면, 내 자식들은 하얀 털이 아니라 누런 털이 되고, 몸을 눕힐 빙하도 없을 거야. 그때까진 괜찮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다음은 너의 자식들이지. 커피를 모른 채 자랄 테고, 파스타나 갈비찜이 아니라 물과 공기를 사 먹기 위해 노동을 하겠지.”
“잘 알겠어. 그런데 이런 이야길 나한테 해도 괜찮은 걸까? 나야 경각심을 가지겠지만, 정작 움직여줘야 할 사람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너한테라도 이야길 하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먼저 포기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러고 나서는 아빠의 컴퓨터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라고. 하마터면 바지에다 또 실례할 뻔했어. 어떻게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건지 정말 신기할 정도였어. 대략 아빠 키의 3배는 되는 것 같았어. 머리가 천장에 닿아서 고개를 앞으로 길게 숙일 정도였으니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미는데 손바닥이 내 상반신을 다 가릴 정도였지.
“이미 유명한 사람들이 내 이야길 듣지 않는다면, 앞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 내 이야길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부디 그러길 바라.”
“정말 고마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노력해볼게.”
“미안하지만 네가 오기 전에 네가 쓴 글들을 읽어봤어. 노력··· 엄청나게 하긴 해야겠더라. 그럼, 이만 나는 가볼게.”
“어, 그럼, 돌아가는 건 어떻게 가려고? 네가 지하철이라도 타려고? 택시도 타기 버거울 거 같은데?”
“아니, 그건 너무 한국 스타일이잖아. 난 북극 스타일이라서. 오로라를 타고 돌아갈 거야.”
그러고 나서는 발코니로 가서 창을 열었어. 정말 코앞까지 오로라가 내려와 있더라고. 아빠는 그때서야 북극곰이랑 사진 한 장 찍어두질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지.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북극 스타일이 멋지더라. 벌써 오로라 계단이 사라지고 보이지도 않더라고.
정말이야, 아니면 아빠 의자가 저렇게 고장이 날 수도 없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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