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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로도 괜찮아
세상의 할머니들은 모두 위대한 분들이시란다. 하나같이 사랑이 넘치시는 따뜻한 분들이시지. 사실 우린 모두 할머니들의 사랑으로 오늘을 살 수 있는 거란다. 당장 아빠만 하더라도 너의 할머니 덕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거지. 할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려는 것도 그래서란다. 할머니는 여전히 아빠를 사랑해주시고, 우리 아기도 사랑해주시거든.
그러니 오늘은 이웃집 할머니에 관한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게. 이 이야기는 세상 모든 할머니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거든.
이웃집 할머니는 너도 한 번쯤은 봤을 거야. 아빠랑 자주 가는 산책길에서 봤던 편의점이 하나 있지? 그곳 사장님의 어머니 이야기란다.
할머니가 젊으셨을 적에 얼마나 꽃처럼 아름다운 분이셨는지는 동네 어르신들이 다 증언을 해주실 수 있다고 하시니까 모르긴 몰라도 정말 미인이셨나 봐.
그런데 편의점 사장님을 키우시느라 힘을 다 써서 그러신 건지, 아니면 챙겨두셨던 기운들을 손자들에게 다 나눠주셔서 그러신 건지, 요즘에는 거동도 불편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지내시는 요양원에 계신가 봐.
아, 우리 아기는 아직 요양원을 본 적이 없겠구나. 거긴 도움이 필요하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란다. 편의점 사장님이 할머니를 직접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나 봐. 그래, 당장 아빠도 일 때문에 너랑 잘 못 놀아줄 때가 있잖아.
일이란 건 참, 그런 거란다. 어쩔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을 만큼 곤란한 걸 많이 만들어내는 녀석이야.
편의점 사장님은 일을 마칠 때마다 할머니에게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어. 우리 아기도 그렇잖아. 아빠 품에 있으면서도 엄마가 보고 싶잖아. 괜히, 이유도 없이. 편의점 사장님도 그러셨던 거야. 편의점에 종일 발이 묶여 있었지만, 사장님의 엄마가 보고 싶으셨던 거야. 괜히, 이유도 없이.
그래서 사장님이 할머니를 만나면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단다.
“난 오늘도 별일 없었어. 뭐, 늘 똑같지. 구멍가게에 큰 별일이라고 있겠어요? 그보다 엄마는? 엄마는 심심하지 않았어? 다른 노인네들하고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여기 사람들이 뭐 불편하게 한 건 없고?”
“응, 나는 다 괜찮아.”
사장님이 길게 물어보면, 늘 할머니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라고만 답하셨어.
“그러지 말고. 엄마, 전화기 바꿔줄까? 영상통화 되는 걸로 말이야.”
“영상통화?”
“응, 나하고 전화로 목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이젠 얼굴도 볼 수 있어.”
“아니야, 괜찮아. 돈 드는 거 하지 마. 그거 비싸잖아. 너 이렇게 오잖아.”
역시 이번에도 할머니는 괜찮아, 괜찮아 라고만 답하셨어.
한동안은 늘 그러셨다고 했어. 딱히 바라는 것도 없다 하시고, 딱히 필요한 것도 없다 하시고, 사장님이 일을 마치고 가면 그저 오늘도 보고 싶었다고 잘 왔다고만 하셨다고 하더라.
이상한 일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어. 다른 날과 다름없이 일을 마친 사장님이 할머니를 만나러 갔었지. 평소처럼 자리에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했는데, 할머니가 한동안 멍하니 사장님을 쳐다만 보더래.
“아저씨는 누구세요?”
어떻게 된 일일까? 할머니가 사장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시더라는 거야. 사장님은 깜짝 놀랐어.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해야 했으니까.
아, 내가 엄마의 아들이란 걸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정말 황당하고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란다. 원래부터 어른들은 나이 먹는 게 싫고, 늙어가는 게 싫어서 늘 시간여행을 하고 싶어 하거든. 그런데 시간여행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사장님의 할머니처럼 평생 누군가를 위해 인내하고, 헌신하고, 열심히 사랑한 사람들 몇 명만 노인이 되었을 때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
그것도 어떻게 딱 정해진 게 아니야. 할머니처럼 사랑이 넘치는 분들에게만 선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거든. 누가, 왜, 갑자기, 그런 선물을 나눠주는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정말 멋진 선물이지. 원하는 만큼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가 있거든. 다만 사장님과 사장님의 할머니처럼 서로가 좀 불편할 뿐이야. 왜냐면, 시간여행은 할머니만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시간여행 중에는 함부로 현재로 돌아올 수도 없거든.
사장님도 그래서 뒤늦게 아시게 된 거야. 그때 할머니는 할머니가 열네 살이었을 때를 여행하고 계셨다고 하더라. 사장님은 같이 시간여행을 할 수 없는 처지라서 답답했지만, 할머니의 얼굴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 보여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데.
이후로도 사장님은 늘 일을 마치고 할머니를 찾아갔지만, 할머니는 시간여행을 떠난 상태일 때가 많았어. 시간여행을 마치고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더 적을 정도였지. 지나왔던 과거가 그리도 좋으신지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여행을 떠나곤 하셨데.
사장님도 그런 할머니를 이해했지만,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잖아, 네가 엄마 품을 찾듯이, 네가 아빠의 웃음을 찾듯이, 그건 이유도 없어. 어쩔 수가 없는 일들은 정말 어쩌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하루는 할머니가 여행에서 돌아오길 바라며 종일 할머니 옆에만 있었다고 해. 편의점도 문을 열지 않고, 전화벨이 계속 울렸지만 일부러 받지도 않았어. 사장님은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러다 어느 순간 스물네 살 시절을 여행하던 할머니가 자리로 돌아와 있었어.
“안 되겠다, 엄마. 내가 전화기 새로 사 왔어. 벨이 울리면 그냥 이렇게 화면을 보고 있으면 되는 거야. 내 얼굴이 화면에 나올 거야.”
“에이, 이런 거 사지 말라니까. 또 돈을 쓰고 그래. 아껴서 너 좋은 거나 먹지 그래.”
“아니야, 이게 좋은 거야. 그래야 엄마도 심심할 때 내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하고, 그게 좋은 거잖아.”
“아니야, 난 라디오로도 괜찮아.”
“라디오?”
“그래, 네가 전에 사줬던 라디오. 아직 소리만 잘 잡히는걸.”
그러면서 할머니가 손을 들어서 가리킨 건 네모난 갑 티슈였어. 사장님은 할머니가 시간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할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였데.
사장님이 할머니에게 라디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해 드렸던 건 이미 이십 년 전이었거든. 할머니는 아직 여전히 시간여행 중이셨던 거야. 사장님은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셨어. 할머니 혼자서만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몹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해.
그렇잖아, 네가 아빠의 등에 올라타고 싶듯이, 엄마의 아늑한 품에 매달리고 싶듯이, 그냥, 보고 싶고, 그냥, 함께 있고 싶은 건데. 이제는 할머니가 그만 너무 멀리 여행을 떠나서 그러기가 힘들어진 거야. 앞으로는 더더욱 힘들어지겠지. 어쩔 수가 없어서 어쩌지도 못할 상황이니까 사장님도 눈물만 나오더래.
참, 이상한 이야기지? 아빠는 그렇단다. 네게 지금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만 들리겠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세상의 할머니들은 모두 위대한 분들이시란다. 하나같이 사랑이 넘치시는 따뜻한 분들이시지. 사실 우린 모두 할머니들의 사랑으로 오늘을 살 수 있는 거란다.
시간여행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평생 누군가를 위해 인내하고, 헌신하고, 열심히 사랑한 사람들 몇 명만이 노인이 되었을 때 과거로,
과거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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