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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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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다




1. 5분과 50분


…솔직히 당신이나 나 정도면, 이런 자리 나오기까지 각자 이런저런 연애 몇 번씩은 해봤을 것이고, 가슴을 다 태운 사랑도 해봤을 테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여자들은 만나던 남자가 키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신들 뺨에 잠시 잠깐 입만 맞춰 주어도 아, 지금 이 남자가 날 사랑해주고 있구나, 아니, 이마저도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거구나. 다들 감으로 알잖아요. 그죠? 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전 약속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단 한 번의 입맞춤도 결코 가볍지 않을 거예요. 물론,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당신이 나를 바라보지 않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아질지도 몰라요. 그래도 전 괜찮다고 말하는 겁니다. 당신의 마음이 나와 함께할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하든, 나는 매번 매순간 나의 떨림과 열정을 당신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건네 드릴 거라고요. 지금의 이 키스처럼….

  촉촉하다, 촉촉하다.

  축축하다.

  여인의 향긋한 입술이라 말하기엔 뭔가 너무나 텁텁하고, 그러면서도 입 주변엔 침이 흥건한 느낌이라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슬며시 한쪽 눈을 떠보려니 눈꺼풀 위로 바위라도 내려앉은 듯 힘겨워 견딜 수가 없다. 꿈이었다. 머리에나 두고 있어야할 베개를 입 안 가득 쑤셔 넣으려다 말고 졸린 눈을 겨우겨우 비비며 몸을 돌아눕는 남자의 모습이 딱 겨울잠에 절어있는 곰 한 마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곰인지 사람인지 분간해보라면 분명 어려운 문제가 틀림없겠지만, 다행히 저 생명체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해 보라면, 남녀노소 국적불문, 틀릴 사람은 아무도 없겠다. 그럴만한 것이 한껏 기지개라도 켰으면 이젠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날 법도 한데, 일어날 생각은 않고 태연히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소리를 내어 벅벅 긁다말고서는 그 손 그대로 꼼지락꼼지락 가지고 노는 꼴을 보이니 분명, 수컷이다.

  그래도 뭔가 아쉽다는 생각도 잠시 잠깐, 사타구니에 넣었던 손으로 이번에는 머리를 벅벅 긁어댄다. 점점 더 헝클어지기만 하는 머리 모양새가 뒤죽박죽인 수컷의 속내와 꼭 닮았다. 분명, 꿈속의 여자는 처음 만났던 여자였던 것 같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째 단박에 들이댈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것도 첫눈에 반했으니 잘 사귀어보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자마자 덜컥 인생 다 걸고 올인 하겠습니다. 당신도 베팅하시겠어요, 콜? 콜!

  세상을 늘 띄엄띄엄 살아와서 그랬는지 꿈을 꿔도 일삼오칠구로 시원시원하게 막장으로 꿨다. 수컷 스스로도 막상 어이가 없지만, 웃어 보이지도 못할 노릇이다. 현실이었다면, 그저 상대가 당혹감에 뺨을 날렸던가, 욕을 날렸던가, 무엇을 날렸던 그걸 한 방만 날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 꿈이라서 참 다행이다 싶어 하면서도 까짓 꿈이었는데, 5분만 더 잘 걸 그랬다 싶어 한다. 5분만, 5분만, 어차피 꿈이니 현실에서 5분이면, 만리장성을 쌓고 또 쌓아도 시간이 남았을 텐데, 누가 꿈 아니랄까봐, 맛이 들어 알맞게 익었을 때, 딱 깨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비틀비틀 용케 세면대 앞으로 옮겨 서서 어푸어푸 세수를 하다말고 흠칫 놀라며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5분은 염병, 맞선까지 50분도 안 남았잖아!


2. 당신의 결혼 가능 점수는?


  우리의 주인공이 씻을 거 다 씻고, 면도하고, 옷매무새 단정히 하는, 호박에 줄긋는 과정 같은 건 일단 모른 척 해주자. 아직 그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우리에겐 적어도 50분의 여유가 생겼다. 난 이 짬을 놓치고 싶지가 않다. 이 틈에 그가 어쩌다 맞선을 보러 나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다.
 

  시간을 단숨에 건너뛰어 지난해 겨울로 돌아가 보자.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용 러브 코미디 영화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개봉했을 때쯤이었다. 주변 회사 동료들이 하나 둘,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약속을 잡고, SNS에서 인증샷이 나돌기 시작하자 우리의 주인공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 이렇게 서른다섯 번째 크리스마스도 혼자인 건가?’

  당혹감을 느낀 다음부터는 순식간이었다. 어느덧 길거리에서 캐럴이 쉼 없이 흐르고, 영화의 순간순간을 패러디한 각종 패러디물들이 SNS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이젠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를 모두가 대략은 알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주연 배우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들이 맡은 역할이 어찌어찌 되는지, 알기 싫어도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넘쳐나듯 패러디 되고 있는 저 장면, 장면들이 어떻게 이어지나 정도는 확인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쯤엔 이미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를 맞이한 뒤였다.

  ‘설마, 이렇게 서른여섯 번째 새해맞이도 혼자인 건가?’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얼마큼이나 궁상맞게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냈는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당연히 새해를 맞이하던 그 순간에, 그가 누구와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말하지 않겠다. 내게 그런 짓궂은 취미는 없다. 다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싶은 순간은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의 어디쯤이다.


  그 날의 회사 분위기란, 여느 직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미 연말 단합회도, 신년회도 할 건 다 같이 했으니, 오늘만큼은 정시 퇴근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으니,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 순서대로 나란히 퇴근만 해주셨으면 하는 눈치, 눈치들이 모여서 소심하게 상사들의 시선 언저리를 돌고 돌았다. 다만, 전혀 진전이 없어 보이는 그 지루한 술래잡기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만은 초연했다. 옆자리 동료들이 괜히 책상정리를 하고, 이미 정리 다 끝낸 애꿎은 서류뭉치만 다시 만지고 있었던 그때, 우리의 주인공은 당당히 웹서핑에 몰두하고 있었다.

  ‘퇴근? 해봤자 뭐 해?’

  당장 일거리를 더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상사와 나란히 책상을 붙이고 앉아 야근을 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는 약속이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바쁜 직장인이 평일 저녁에 따로 약속을 잡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하지만, 호르몬이 넘쳐나는 멀쩡한 총각이 새해를 앞둔 연말 저녁에 약속이 없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경우의 수다.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평소에는 생각을 않고 지내더라도 연말쯤 되면, 부모 생각, 친구들 생각, 서로 챙겨주고 정을 나눠 받던 인연들 하나, 둘씩 떠올라 전화라도 한 통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눈, 코, 입, 사지 멀쩡한 총각이 아무런 약속도, 기약도, 심지어 어떤 시도조차 않으려고 하니 슬슬 어딘가 좀 딱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때마침, 나 역시도 좀이 쑤시고 지루하던 차라 호기심에 슬쩍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시 그의 머릿속은 그의 책상 모니터에 빼곡하게 붙어있던 메모지마냥 참으로 팍팍한 계산들이 오밀조밀 다닥다닥 붙어 연산되고 있었다.

  ‘그래, 올해도 이렇게 가는 거지 뭐. 새해랍시고 집에 내려가면 뭐하겠어? 또 구정도 있는데, 그럼 왕복차비도 두 배, 부모님 드려야 할 용돈도 두 배, 그렇다고 친구들을 만나자니… A는 술만 펐다고 하면, 계집질을 하자는데, 계집질할 돈은 또 어디 있어? B도 연락하자니, 이 자식은 나보다 돈도 잘 버는 녀석이 매번 꼭 더치를 하자니 그것도 내가 손해 보는 거 같고, C도 연락하자니 녀석을 만나려면 이 시간에 왕복차비가 숙박비만큼 들 것이고… 그래, 인생 뭐 있나? 이런 날은 숨만 쉬며, 흘려보내는 게 돈 버는 거야. 외로운 거야, 늘 외로웠지. 새삼 옆차기 하지 말자, 숨만 쉬자.’

  팍팍한 연산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소금기 짠 내음이 확 올라왔다. 녀석, 박봉이었구나. 박봉인데 어쨌든 열심히 버티어 온 거로구나. 그러니 다음 순간 우리의 주인공이 스포츠신문 사이트에서 연예인 P양의 비키니 화보를 클릭하고, <‘이것’먹은 중년男, 강남女도 떡실신…> 같은 찌라시 향이 가득 풍기는 배너광고를 클릭한 것 정도는 눈감아주도록 하자. 그런 것들 보단 그 다음 클릭이 중요하다.


  ‘당신의 결혼 가능 점수는?’


  그가 결혼정보업체 사이트의 배너광고를 클릭했다.


3. 무려 80점


  처음에는 그가 단순히 실수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우선 광고배너의 크기가 애매한 점도 있었고, 배너가 노출되고 있는 위치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결혼정보업체 광고배너 바로 밑에는 그가 평소 즐겨보고 있는 성인용 웹툰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링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평소 행동거지나 차림새가 동네 사십 대 중반 아저씨들보다도 더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었으니,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와서 결혼정보업체라니? 퇴근시간 앞두고 한 번쯤 재미삼아 테스트 정도는 해볼 수도 있는 법이지만, 다음 순간 그가 신중하게 본인 프로필카드를 작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놀라 숨이 턱하고 막혔던 것이 사실이다.

  키는 키높이 구두가 있으니 실제보다 5cm 크게, 몸무게는 맞선 보러가기 전에 쫄쫄 굶으면 되니 5kg 적게. 연봉은 나이 숫자만큼 일단 적어놓고, 어디서 들어둔 건 있어서 취미는 무난하게 활동적인 등산과 비활동적인 영화를 둘 다 적어 넣고, 동산과 차량 소유, 종교는 빈칸으로 남겨두는 센스를 보이더니 말미에 이르러 자소설도 제법 폼 나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잘 살아 보고 싶어서 무작정 일만 하다 보니 회사에서의 입지는 제법 다져졌습니다만, 짝을 만들지는 못했네요. 그래도 저는 첫눈에 반하는 운명 같은 사랑이 아직 제 인생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자기소설서답게 ‘아직 짝을 만들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초하여 숱한 뻥들이 곁가지를 치며 무성하게 자라났다. 아니, 올해도 과장 진급자 후보 명단에조차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회사 내에서 만년 대리로의 입지는 확실히 제법 다져지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소설서에 따르면, 우리의 주인공은 유별난 사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이나 처지에 이유가 없는 남자도 아니었다. 연애를 못해 본 건 회사에 충성하느라 바빠서였고, 사회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통장에 돈이 말라있는 건 노모를 위해 아낌없이 주는 효자여서 그런 것이고, 몸이 무거운 건 주변에 힘들다는 친구 녀석들 사연 들어주다 한두 잔씩 속에 털어 넣은 술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니 작성한 프로필만 봐서는 총각도 이런 총각이 없겠다.

  짧은 문장이건만, 몇 차례나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고 다듬는 와중에도 사무실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있었다. 인턴들은 평사원의 눈치를, 평사원은 대리를, 대리는 과장을, 과장은 부장을, 다들 서로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우리의 주인공만 바빴다. 이제 휴대폰번호만 입력하고 ‘보내기’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소변기로 흘려보내는 게 소변이었는지, 그의 잡념이었는지는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가지는 않아서 모르겠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몇 차례 더 의미 없이 서류를 뒤적였던 걸 보면, 어느 쪽이든 개운하지는 못했으리라. 다시 담배를 챙겨들고 휴게실로 나섰다. 그의 뒤통수를 부장이 노려보았고, 부장의 눈빛에 과장이 움찔하였고, 과장의 움찔거림에 대리도 담배 한 대가 간절해졌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의 주인공은 휴게실 한편에 몸을 구겨 넣고서는 홀로 담배 한 대를 여유롭게 태웠다.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잘 몰라도 혼자서 담배연기로 물레방아도 굴려보고, 도넛도 만들어 허공에 날렸던 걸로 봐선 이미 결심은 끝낸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두 손바닥을 마주 비벼주고 나서 공일공, 코를 훌쩍여보고, 땡땡땡땡에, 머리를 긁적여보고, 뿅뿅뿅뿅. 클릭과 함께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러자 자연스레 하품이 터져 나왔다. 하, 아, 아. 늘어지기 시작하는 하품에 턱이 뾰족하니 삐뚤어졌다. 그리고 어렵사리 턱이 다물어지려고 할 때, 딩동. 문자메시지가 왔고, 내용을 제대로 확인해 보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00결혼정보업체입니다. 결혼가능점수가 무려 80점이나 나오셨네요!’


4. 총각과 노총각


  아, 아, 네, 안녕하세요. 아직 사무실에 상사들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건너편 책상의 미스 김이 신경 쓰였던 탓인지, 여하튼 전화를 받는 우리 주인공의 목소리가 염소처럼 힘없이 떨렸다. 반면, 전화 저편의 목소리는 대단히 안정적이고 활기차다. 조건이 매우 괜찮으신데, 안타깝게도 아직 인연을 못 만나셨나 봐요. 제법 연륜이 묻어나는 여성의 음성,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신뢰감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에겐 조금 다르게 들렸나보다. 아니, 어쩌면, 무려 80점이나 된다는 말을 거듭 반복해서 들려주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우리 주인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복잡 미묘하다.


  그리고 그 복잡 미묘함은 명료해지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결혼 가능 점수가 무려 80점이나 되면서 여전히 짝이 없는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던 결혼정보업체의 영업사원은 그날 이후로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우리의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도 한 번쯤 전화가 왔고, 축 처진 어깨로 퇴근을 하던 길에도 전화가 왔고, 주말에 홀로 방에 처박혀 게임을 즐기고 있을 때도 전화가 왔었다. 고객님, 이번 설에는 그래도 좋은 소식으로 부모님 뵈셔야죠. 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는 말과는 달리 가입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입비용을 듣고 나서는 그때부터 모르쇠다. 무려 80점이나 되는 분이시지만, 한 달 급여만큼이나 되는 가입비용을 떡하니 결제할 수는 없는 몸이기도 했다.

  ‘주판 때려보니 여자 한 번 만날 때마다 만나는 기회비용만 5~60만 원 가량이 그냥 깨지는 거네. 만나면, 찻값도 내가 내고, 식사를 해도 내가 낼 거고, 술을 마셔도 그것도 내가 내겠지? 그럼, 뭐야? 교통비까지 하면, 그게 다 얼마야?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났는데, 마음에 안 들면, 그런 손해가 어디 있겠어? 이야, 참, 도둑놈들이 따로 없구나. 그 돈이면….’

  그래, 그 돈이면, 동네 자장면이 몇 그릇일까? 곱빼기로 먹어도 제법 그릇 수가 나올 게 분명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게임기패드를 집어 들었지만, 게임이 조금도 즐겁지 않다. 우리의 주인공은 게임기 패드를 던져두고 바로 몸을 눕혔다. 전기장판의 열기가 저렴하게 흘러 등을 데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휴대용 버너 약한 불에 서서히 굽히는 오징어마냥 기지개인지, 나름의 스트레칭인지, 뭔지, 도대체 모를 꿈틀거림을 보이더니 팔을 뻗어 베개와 스마트폰을 찾아 더듬었다. 그리고는 손끝에 폰이 닿자마자 재빨리 폰을 두드렸다.


  - 저는 올해로 서른여섯을 맞이하는 총각입니다. 며칠 전 우연찮게 결혼정보업체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제가 결혼 가능 점수가 80점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집도 없고, 차도 없는데, 점수가 너무 높게 나와서 당황스러우면서도 제법 솔깃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나도 가입을 해볼까 싶기도 해서 가입비용을 들어봤는데…. 맙소사. 가격이 장난 아니더군요. 거의 이백만 원을 내야 하는데, 만남을 다섯 번만 주선한다고 하네요. 솔직히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어요. 만남이 꼭 좋은 방향으로 성사되리란 보장도 없으니, 모든 리스크는 저의 몫이잖아요? 혹시 결혼정보업체 통해서 결혼에 성공하신 분들 여기 계신가요? 정말, 참, 난감하네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추운 겨울날 전기장판에 몸을 눕힌 채 종일 게임을 하다가 멋대로 널브러져 잠드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건 한 달 내도록 해도 몇 만원도 채 들지 않는데, ‘여자사람’ 한 번 만나기 위해 저런 거금을 내야한다고 생각을 하니 새삼 제 신세가 처량하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럴 때 주변에 터놓고 말할 친구도 없는 것일까? 아님, 친구들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운 것일까? 그런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그때부터 댓글만 달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총각의 모양새가 딱해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탈탈탈 다리를 털며 초조해하는 모양새도 가관이었지만, 벅벅벅 감지도 않은 머리를 긁어대는 폼도 흉악했고, 몸을 반대로 굴려 방귀를 뿡 하고 내뿜는 모양새는 밥맛이 딱 떨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톡, 톡, 톡. 초조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액정을 무의미하게 두드리는 동안 딩동, 딩동, 딩동. 댓글들이 달려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얼굴에 다시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드리워지는데, 그마저도 안타까워 보였다.


  - 그냥, 그 돈으로 나이트 가서 양주 한 병 시키고 부킹을 하세요. --;

  - 집에서 게임하는 것과 비교가 될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우선 님께서 ‘여자사람 친구’들이라도 좀 만나고 다녀야 그들이 소개팅이라도 주선해줄 텐데… 주말에 게임만 해서는 답이 없어요.

  - 결혼정보업체들이 이래서 돈을 버는 거랍니다. 윗님 말씀처럼 평소에 잔돈 들여 투자했으면 되었을 일인데, 그런 작업을 안 해두셨으니 지금 목돈이 들어가는 거죠. 뭐, 저는 그런 면에서 저 비용이 결코 비싸 보이지는 않네요. 막말로 평생의 짝을 찾게 되는 건데, 그깟 돈 이백이 무슨 대수겠어요?

  - 오, 이백만 원쯤은 간편 결제 가능한 용자 등장!

  - 저는 결혼정보업체 통해서 결혼에 성공한 남자사람입니다. 저는 앞서 주변 지인들 통해서 소개팅도 받아보고 했지만, 정말, 짝은 다 따로 준비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업체 소개를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도전해 보세요!

  - 요즘 미연시 게임들 그래픽이 장난 아니기는 하다지만, 어차피 2D. 경제적 여건이 되면, 질러보세요. ‘3D 여자사람’이 주는 기쁨은 확실히 2D와는 달라요. 하하, 파이팅!

  - 저는 현재 업체에 가입을 한 상태의 남자사람입니다. 사실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인간적으로 누굴 만난다거나 어디 취미활동, 동호회 활동 같은 걸 하면서 사람 만나기도 여의치가 않아서요. 지금 두 번 정도 기회를 사용해봤는데, 그리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요. 스케줄도 매니저가 알아서 최대한 조정해주니 편하긴 편해요.


  별의별 말, 말, 말들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종종 문맥도 없고, 일방적인 비난에만 그치는 악플들도 넘쳐났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어쩐 일로 조금은 ‘주인공’다운 의젓한 모습을 보이며 쉽게 지나쳐갔다. 그렇게 정성들여 꼬박꼬박 댓글을 하나씩 달아주다 말고 그의 손가락이 갑자기 멈춰서버렸다.


  - 우리 모두 솔직해집시다. 올해 서른여섯인데, 차도 없고, 집도 없으면, 그게 총각입니까? 노총각이지? 80점? 그건 결혼정보업체가 님 주머니에서 돈 빼먹으려고 약치는 소리죠. 그렇게 치면 머리 벗겨졌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우리 삼촌은 99점 나오시겠어요. 80점 같은 소리에 혹해서 가입했다가 막상 맞선자리 나가서 집도 없네, 차도 없네 하면, 요즘 아가씨들이 어디 사람만 보고 만나준답니까? 막말로 님 얼굴이 장동원빈이 아니니까 주변에 여자사람들이 없는 걸 텐데, 혹시 직업이 공무원이나 선생님 같은 건가요? 그런 평생직이라도 되어야 현실적으로 뭔가 타이틀이 되죠. 여기 응원하는 글 남기시는 분들, 자기 인생 아니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 분은 지금 진지합니다.


  아, 저런, 타이틀이 없구나.
  한동안 멍하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5.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서?

 
  호박에 줄긋기를 마친 주인공이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이미 늦었다. 곧바로 택시를 탄다고 해도 아슬아슬하다. 전력질주를 마지막으로 했던 적이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 육중한 몸매 덕에 지켜보고 있는 이의 무릎이 다 후들거릴 정도다. 성급하신 몇몇 독자들께서 저런 정신으로 무슨 맞선을 보느냐, 본다 한들 장가는 다 갔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내가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남아 있으니 마저 들어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문제의 댓글을 마주하고 정확히 열흘 뒤, 그는 결혼정보업체에 가입을 했다. 열흘 전에도 없던 본인명의의 집이 열흘 안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차를 계약한 것도 아니고, 자존감을 회복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가입을 했다.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요, 활짝 웃는 얼굴로 계약서를 내밀어보이던 매니저에게 그가 시큰둥하게 답한 인사말이었다. 참, 말마따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열흘 만에 마음을 정했으니. 물론, 어떻게든 깎고, 깎고, 깎아서 할인된 금액에, 무료 맞선 기회 두 번을 더 보장받는 걸로 하고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약관 동의서에 서명을 남기기 직전까지 흔들렸던지 매니저에게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매니저님은 총각과 노총각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노총각일까요? 다행히 매니저는 노련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확고하게 고개를 저으며, 은근히 시선을 펜 끝으로 옮겨둘 뿐이었다. 헌데, 웬 걸? 따로 묻지도 않았는데, 동의서에 서명을 한 그가 떠벌떠벌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를 잘도 풀어냈다.

  살다보니 나이가 찼을 뿐인데, 아끼고 아껴도 여전히 월세 신세, 전세도 벅찬 내 신세, 승용차 한 번 굴려보려니 구르는 바퀴 따라 유지비만 흘러내릴 것 같아서 지하철만 타는 신세, 그렇게 신세타령만 하면서 버티다보니 ‘노총각’이란 타이틀만 챙겼네요. 그래도, 그래도 또 혹시 모르잖아요, 사람 인생이라는 건. 제가 웃긴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제 인생이 좀 코미디거든요. 제가 대학생 새내기 때 일인데요, 중, 고등학생 때야 교복만 주구장창 입었으니 몰랐는데, 대학생이 되니까 다들 사복을 입고 다니더라고요. 근데, 저희 집이 좀 가난했어요. 그래서 당장 입을 옷이 걱정이었지, 브랜드 메이커 같은 건 상상조차 못했죠. 다들 새내기라고 알록달록 차려 입을 때, 그래서 전 늘 우중충하게 입고 다녔어요. 근데, 그게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나도 멋 부리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괜히 무시당하면서 지내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두 탕 뛰었어요. 남들은 하나만 해도 생활비가 어찌되었는데, 전 방값도 필요했고, 밥 먹을 돈도 필요했거든요. 그래도 큰돈이 되질 않아서 쪼개고 쪼개서 한 달에 한 번은 청바지를 샀다가 다음 달에는 티를 한 벌 샀어요. 웃긴 게 그 다음 달이 되니 계절이 바뀌더군요. 그래서 방학을 기다렸어요. 방학 땐 하루에 세 탕, 네 탕도 가능했거든요. 죽었다 생각하고 아르바이트만 했어요. 그래서 돈을 얼마 모았는데, 개강할 때쯤 되니까 영장이 나오더라고요. 하하, 웃기지 않아요? 제가 그때 알았어요. 인생 참, 모를 일이란 걸요.

  동의서에 서명을 받은 매니저는 정확히 그의 사설이 멈출 때까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가 서명한 볼펜의 잉크가 마를 때까지만 기다려주었다. 아, 저도 미처 몰랐군요. 제가 고객님과의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네요. 이미 다음 상담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오늘은 이만 마무리를 지어야겠군요.


  이쯤에서 정중하게 상담실 문을 열어주는 매니저와 씁쓸하게 쏘아보며 문을 나서는 우리의 주인공을 떠올린 분들이 계신다면, 잠시만, 그 시기적절한 상상은 접어두도록 하자. 그보다는 조금 더 집중해 보자. 보라, 이 짠내가 물씬 풍기는 구두쇠가 목돈을 들여서 가입을 했으니, 견주기를 얼마나 견주었을 것이며, 기대하기를 또 얼마나 기대를 했을지.


  6. 지나온 여자들


  택시, 택시.

  대로변으로 구르다시피 뛰어내려와 허공에 대고 팔을 허우적대는 모양새가 필시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이 지나가는 배를 보고 환장하는 꼴이다. 그래도 업체 가입 후, 맞선을 처음 봤던 그날 밤에는 택시를 불러 세우는 폼도 제법 우아했는데 말이다. 살짝 비도 뿌려줘서 나름 운치가 있었던 그날 밤. 우리의 주인공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출발이 순조로웠다.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고 있다던 여자는 성실하게 한 직장에서 오래도록 일을 하고 있었고, 취미나 성격 등도 문제 될 부분이 없었다. 나이가 제법 있는 편이었지만, 흠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의심될 만했다. 프로필만 봐서는 딱 그가 찾던 타입이었다. 재고할 필요도 없이 매니저에게 만남을 부탁했고, 상대도 그의 프로필을 보고 응해주었다. 집이 없고, 차가 없어도 응해줬단 사실에 그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날짜가 잡히고, 구체적인 시간을 맞추고, 장소를 정하고, 그곳에 미리 나가서 기다리기까지 그의 심장은 평소보다 정확히 반 박자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일사천리. 이런 게 일사천리구나. 그래도 너무 급히 가면 탈이 날지도 모를 일이니 상대가 오기 전에 먼저 커피를 주문하고 향을 음미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커피향이 입안을 충분히 감싸 안을 때쯤, 커피숍의 문이 열리고 상대 여성이 입장하였다.

  뚜둑.

  그리고 긴장의 끈이 풀렸다. 걸어 들어오는 여자는 모든 것이 프로필 그대로였다. 다만 실제 나이도 제법이었지만, 얼굴은 나이보다도 더 들어있었다. 오시는 길이 많이 막히지는 않던가요, 그가 가볍게 웃어보였다. 나도 생긴 게 참 어지간하다만, 조금 더 활짝 웃어 보일 수는 없었다. 차는 녹차, 커피, 아메리카노로 하시겠어요, 그래도 먼저 말을 걸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게 매너라 생각했다. 아, 그래, 뭐, 이 나이가 되었으면, 다들 저마다 허물은 한두 가지씩 있는 거지, 입안이 마르는 기분이라 커피를 들이켰다. 그래도 집이 없고, 차가 없어도 시간을 내서 자리에 나와 주신 분인데, 분명 조금 전까지는 향이 깊었던 커피였는데, 아무런 향도 못 느끼게 되었다. 하시는 일이 사회복지사라 하셨죠,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끊임없이 말을 하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던질 때마다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살피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날아간 기회비용에 대해서 주판을 때려보았고, 찻값을 따져보았고, 교통비를 셈하여 보았다. 휘발된 긴장감만큼 숫자들이 뇌리에 박혀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예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여자가 커피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충분히 인내하며 기다렸다. 모셔다 드릴게요, 택시, 그렇다. 그날 밤 그 여자의 눈에는 택시를 불러 세우는 주인공의 모습이 제법 우아했나 보다. 혹시 맞선 여러 번 보셨나요? 이렇게 집까지 에스코트 해주신 분은 처음이라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 그는 연락처를 묻지 않은 채 돌아서야 했다.

  빨리 좀 가주세요.

  어렵사리 택시를 잡아탔다지만, 도로 위는 주차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꽉 막혀서 진전이 없는 모양새가 꼭 두 번째 맞선을 보기 직전 같다. 업체에 가입을 했으니 이제는 그가 여성들의 프로필을 받아들고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를 매니저에게 통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상대 여성들도 자신의 프로필을 받아들고 견주어 본 다음, 거절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 맞선 이후,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빨리 좀 잡아주세요.

  결국 그가 백기를 들었다. 자신의 입맛에 맞춰 고르고 고른들, 늘 상대 여성들이 거절해버리니 답이 없었다. 시간만 흐르고, 나이만 먹어간다는 생각이 들자 더 조급해졌다. 매니저에게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묻지 말고, 자신의 프로필을 받아보고 승낙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만나보겠다고 알렸다. 시작도 전에 백기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만남은 출발도 좋지 못했고 마무리도 좋지 못했다. 그의 프로필을 보고, 만날 의사까지 보였지만, 약속한 날에 여자는 일방적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는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를 몰라 약속 장소에서 오지도 않을 사람을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빨리 좀 알아봐주세요.

  대체 왜 일방적으로 안 나온 것인지, 이유나 알자고 매니저를 들볶았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매니저의 중재로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이미 호감이라 할 만한 것들은 휘발된 두 사람이 대화다운 대화를 하긴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전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서 전혀 관계없는 네일아트를 하고 있던 그녀의 이력에 대해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대학교 갈 마음도 없었어요. 집에서 가라고 해서 4년제 다니며 4년 동안 놀 자신은 없어서 전문대 가서 2년만 놀다 졸업한 거예요. 덜컹. 달리던 택시가 속도를 줄이지 않아 턱을 타고 살짝 들어 올려졌다. 쿵, 덕, 쿵. 그의 엉덩이도 시트에서 들어 올려졌고, 어렵사리 힘을 준 머리가 천장과 입을 맞춘 후, 이번에는 엉덩이도 다시 시트와 입을 맞춘다. 아, 짜증나! 살살 좀 가요! 손님이 빨리 가자면서요? 어떻게 해요? 속도 줄여요? 세상, 참, 선택할 일도 많다.

  이걸 어쩐다?

  세 번째 만남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던 일이다. 맞선을 보러 나오기엔 여자의 나이가 너무 어렸고, 집안도 그녀의 아버지가 대기업에 여전히 다니고 있는 상태라 그가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잘났는데? 게다가 여자의 직업이 기간제 보건교사에 취미로 스쿼시를 즐긴다고 하니 아무리 봐도 맞선을 볼 입장이 아니었다. 뭐가 부족해서? 앞서 두 번의 경험 덕분에 슬슬 의심이 들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무려 일주일을 넘게 고민을 했다. 나갈까, 말까, 반면, 여자 측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프로필을 보자마자 바로 승낙을 했다. 당연히 우리 주인공의 소심한 새가슴이 활짝 열렸다. 그는 기쁜 마음에 지방에 살고 있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그나저나 첫인사는 어떻게 건넬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괜히 문턱에서 뒤돌아 주변을 둘러봤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혼자서 속으로 인사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로 들어서니 이미 상대 여성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정말, 잘났는데? 여자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키도 그보다 컸고, 정말 스쿼시를 열심히 했던지 몸매도 탄력이 있어 눈을 마주하려니 괜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 안녕하세요, 바, 반갑습니다, 그렇게 버벅거리며 트인 말문이 제법 몇 차례 주거니 받거니 대화로 이어지는 모양새를 보였다. 얼씨구나, 느낌이 좋다싶어서 슬슬 자리를 옮겨볼까 조심스레 눈치를 보려니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먼저 꼬리를 잘랐다. 사실 집에서 억지로 가입시킨 거예요. 프로필요? 전 그런 건 보지도 못했어요. 미안해서 어쩌죠? 그래도 먼 길을 오셨는데, 괜찮다면, 저녁 식사 정도는 제가 대접해 드릴까 해요.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따위 안중에도 없는데, 업체에 가입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보다 관심도 없는 사람과 저녁을 먹을 수가 있나? 이건 꼬리를 자른 것인가, 자른 것처럼만 보이려 하는 것인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쩐다?

  차가 막혀도 너무 막힌다. 택시에서 내리려니 거리가 제법이고, 버티자니 지각을 피할 길이 없다. 뭐, 그래도 그날은 지금처럼 땀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심 망설인 걸 내색조차 않으며, 말했었다. 네, 그럼, 맛있는 걸 먹으러 가볼까요, 다시 보기 힘들 산해진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날 갔었던 식당의 분위기며, 음식의 맛이며,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다만, 숟가락을 놓았더니 반사적으로 여자가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문자 그대로 딱 저녁밥 한 끼 사주고서는 꼬리를 자르고 사라졌던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뛰자. 그가 택시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다. 평소 전혀 몸을 놀리지 않다가 뜀박질을 시작하니 허벅지며, 종아리며, 비명을 지르지 않는 곳이 없다. 심지어 폐도 놀랐는지 속도를 붙이기도 전에 숨을 내쉬기조차 힘들어 보인다. 십 미터나 뛰었나? 택시 천장에 눌린 머리며, 땀에 절기 시작한 셔츠며, 누가 봐도 맞선 보러가는 낯짝이라곤 상상조차 못하리라.

  그만 일어날게요.

  다음, 네 번째 만남은 그중 최악이었다. 그의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초면에 만나자마자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는 거다. 그날은 오늘처럼 늦잠을 자지도 않았고, 서둘러 택시를 타지도 않았고, 도중에 내려 뜀박질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만나기로 해서 만난 것이니 차는 한 잔 하고 헤어지자고 커피를 주문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던 여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에 그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자 이번에는 얼음을 빨대로 콕콕 찍었다. 얼음에 빨대가 콕콕 찍힐 때마다 그의 심장도 콕콕 찍혔다. 네, 그만 일어나죠. 여자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좁은 골목을 돌아 빠져나오면서 그는 대체 자신의 무엇이 문제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가 곰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정말, 참,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의 연속이다. 이미 뒤돌아서서 한참을 지나왔는데도 여전히 빨대가 콕콕 그의 심장을, 머릿속을, 찍어대는 것 같았다. 아니, 숨이 가쁘게 뜀박질을 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 일들을 몇 개월에 걸쳐 겪었으니 지금 그의 정신이 온전한 상태라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그러니 그가 요즘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건, 그래서 어제도 뜨는 해를 보기 전까지 잠들지 못했었다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7. 그래도 아직은 문밖이니까?

 
  매니저에게 전화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다. 이제 때려치우겠으니 남은 횟수만큼 환불을 해달라고 깽판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게 쉬웠던가? 되려 약관절차가 어쩌니저쩌니 매니저로부터 일장연설만을 들어야 했다. 결국 화를 내는 것에도 지칠만할 때쯤 매니저가 선심을 쓰듯 마지막 만남은 횟수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말에 타협을 보긴 했다.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완전 누그러지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통장을 정리할 때쯤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간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길바닥에 흘린 돈들이 카드고지서로 주검이 되어 되돌아 올 때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말없이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벽만 쳐다보며 지낸지 이 개월 정도 지나갈 무렵,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님, 이번 추석에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좋은 소식은 못 들려드리게 되었네요. 그렇다. 설 다음에는 추석이고, 추석 다음에는 또 설이다. 그래서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이 남자가 뛰고 있다. 삼십 미터쯤 뛰었나? 모르긴 몰라도 뛴 만큼은 더 뛰어야 한다. 그러면,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지킬 수 있다. 다만 구두를 신은 발바닥이 타는 듯 하고, 왁스에 떡이 진 머리는 땀으로 세척을 했고, 셔츠며, 재킷이며, 바지며, 무엇 하나 구겨지지 않은 곳이 없고, 땀에 젖지 않은 곳이 없을 뿐이다.
 
  아차차, 위태위태하더니 제일 먼저 다리가 고장 난다. 그의 다리에 쥐가 오른다. 곧이어 머리도 어지러워 보인다.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더니 헛구역질을 해댄다. 이런 꼴을 겪고 있는 걸 보니 약속 장소에 나타날 여자가 어떤 여자일지 자꾸만 더 궁금해진다. 헌데, 그도 그럴까? 당장의 표정으로 봐선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다. 아니, 지금의 표정으로는 고통 외에는 읽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 맞겠다.

  절뚝절뚝. 조심스레 다리를 움직여 본다. 통, 통, 통. 주먹으로 허벅지와 종아리를 두드리며 다시 허리를 곧게 편다. 먼발치, 오르막길 너머에 있을 약속장소를 겨냥하고 반대편 발을 내딛어 본다. 찌르르르, 반대편 다리로 또 한 차례 전기가 흐르나 보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하고 삐져나온다.

  나 같은 쪼다가 또 있기나 하겠어?

  작은 목소리로. 옹알이를 하듯, 삼키듯, 혼잣말을 하더니 또 한 발을 내딛어 본다. 이런, 십 분 정도 지각은 이제 어찌 피하지 못할 일이 되었다. 절뚝절뚝. 그래도 오르막길을 오른다. 아직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아직은 문밖이니까. 절뚝절뚝, 엉금엉금, 다리로 걷는 게 아니라, 다급한 표정, 악을 쓰는 표정으로 내딛는다. 그러는 와중에 오르막을 올라 호흡이 고르게 돌아온다. 약속된 커피숍의 문 앞에 이르자 다리의 쥐도 풀린다. 일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지 그가 잠시 주춤한다. 다시 길게 호흡을 가다듬고 커피숍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핸드폰 벨이 울린다. 여자 측의 안심번호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기로 했던 여자입니다. 죄송합니다. 차가 좀 많이 막히네요. 이미 십 분이나 지났는데… 아직 이십 분은 더 걸릴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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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명 단편소설] 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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