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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怪談)
1.
신화 속에서 살았던 프로메테우스와 1847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태어났던 발명가 에디슨은 서로가 단 한번 만나기는커녕 서로의 이름조차 교환하지 못했을 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 각국의 귀신(鬼神)과 도깨비들에겐 공공(公共)의 적(敵)으로 함께 분류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위해 신(神)들로부터 불을 훔친 죄로 코카서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가혹한 형벌을 치러야했다. 그의 희생으로 인류는 불을 이용하여 밤에도 활동이 가능해졌다. 귀신과 도깨비들에겐 달갑지 못한 역사적 변화였다. 그 때부터 귀신과 도깨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감행하여야 했다. 그나마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오랜 시간을 들여 상대하던 끝에 나름의 대처법이 생긴 편이다. 우리나라의 처녀귀신들만 하여도 인간들이 상상 못할 수준의 냉기를 입김으로 뿜어내어 호롱불을 끄지 않았던가?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귀신들이 살만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1887년의 3월. 경복궁 향원정의 못물을 먹고 켜진 불이 건청궁 처마 밑에 벌겋게 켜졌을 때, 이 땅의 귀신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지구반대편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에디슨이 수천만 번의 고생 끝에 발명해낸 백열전구가 8년도 채 걸리지 않아 조선 땅에서 불을 밝혔을 때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빛을 뿜어내는 이 요상한 물건은 귀신들의 활동 시간대와 행동반경을 좁혀가며 압박했다. 백열전구에 대한 대처법 역시 귀신들이 연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류는 귀신들의 연구 속도를 앞질러 질주하고 있었다. 곳곳에 가로등이 들어섰고, 건물들이 쉼 없이 늘어섰으며, 냉기를 머금은 입김 따위로는 좀체 흔들릴 생각조차 않는 발전소가 보란 듯이 떡하니 들어서고 있었다.
결국, 밤을 지배하게 된 인류는 더 이상 귀신과 도깨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귀신들은 어둠을 갉아먹는 빛을 피해 세계적으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추세가 이렇다보니, 배가 부른 인류가 괜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최근에 들어서는 귀신과 도깨비가 생태환경의 변화로 멸종된 종자(種子)라는 의견과 예초부터 그런 것들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상의 존재들일 뿐이라는 의견이 맞물려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21세기인 요즘은 귀신이나 도깨비를 만나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렵게 되었다. 인류의 압승이다.
그럼, 인류는 이제 두려움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홀로서기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건 아직 아닌 것 같다. 아무리 환하게 불을 밝힌 곳이라고 하여도 우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도 귀신과 도깨비를 품고 있는 어둠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대낮에도 우리들 눈앞에서 횡행하고 있는 어떤 공포에 관한 이야기다.
솔직히, 이 이야기를 잠시 떠올린 것만으로도 오싹함에 앉아있기조차 버겁다. 시작에 앞서 잠시 기도라도 올려야겠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2.
동네 어귀에 있는 편의점은 병춘이 군복무를 하던 중에 생긴 까닭에, 갓 전역을 한 병춘에겐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곳 같은 생경한 이질감을 종종 선사하곤 했다.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길조차 돌아서가던 문제의 그 편의점과 병춘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다음과 같은 전단지 때문이었다.
XX편의점 평일 아르바이트생(남) 구함.
군필자우대. (만 21세 이상)
시간대 : 22:00~06:00 (8시간. 시간대 조절 가능)
시급 : 상담 후 결정
(면접 시, 주민등록등본 1통 지참)
연락처 : 010-4444-****
전단지를 보았던 것은 불쾌할 정도로 화창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문밖으로 세 걸음만 옮겨도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지면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외출은커녕 무슨 일이든 하게 되면 불쾌지수에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날. 다행인지 불행인지 천성이 게을러터진 병춘이었다. 선풍기를 꺼낼 생각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서 미동도 않은 채 방 한 쪽에 구겨져있었다. 쪼르르륵. 눈앞으로 바퀴벌레가 지나가도 꼼짝도 하지 않던 병춘이가, 꼬르르륵. 몸을 일으킨 것은 순전히 배가 고파서였다.
파바바박. 대문을 열고 나서니 길고양이들이 먼저 도망을 쳤다. 병춘은 그런 길고양이들 보다도 더 민첩하게 편의점을 향해 곧바로 내질렀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발이 멈추어 선 곳은 편의점이 아니라 편의점 맞은편 가로등에 붙어있던 전단지 앞이었다. 아르바이트? 복학을 앞두고 이보다 돈 벌기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병춘이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딛자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배고픈 건 일도 아니었다. 쉽게 등본을 구했고, 쉽게 면접 시간을 정했으며, 쉽게 취직이 되고, 쉽게 일을 배웠다. 심지어 야간에 일어날 수 있는 비상사태에 따른 대처법도 순식간에 배울 수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여기 카운터 밑에 있는 빨간 단추를 눌러. 그럼, 경찰들이 바로 달려올 거야. 뭐, 누르고 나서도 상황이 좀 거시기하다 싶으면 여기 야구 배트 보이지? 그냥, 갈겨버려.”
턱수염이 부슬부슬한 점장의 얼굴과 야구 배트 사이의 무표정한 간극은 모든 과정을 더욱 단순하고 수월하게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수월한 일의 진행이 병춘이를 그날의 그 사건까지 끌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인류가 밤을 지배하게 된 역사는 밤을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었던 역사에 비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짧다. 병춘이의 몸속에 누적된 유전자 정보들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온 것들이어서 낮에 일과를 보내고, 밤에는 숙면을 취해주었던 조상들의 생체리듬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일을 마치고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잠자리에 들어도 늘 새벽 3시가 되면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병춘이는 그럴 때마다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케이블TV의 채널을 돌렸다. TV를 보면서 곤란한 점이 있었다면, 틈틈이 찾아드는 손님들 덕에 집중을 못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새벽 시간대에 방송되는 영화들이 종종 에로영화일 때가 있었다는 점이다. 한 번은 채널을 돌리던 중 에로영화채널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이 여성이었다. 화면과 병춘이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고, 민망한 병춘이는 재빨리 채널을 옮기고 싶었지만. 제기랄.
시원찮던 리모컨의 건전지가 수명을 다한 후였다. 화면 속의 두 남녀가 거친 신음소리를 내뱉었고 덩달아 병춘이의 얼굴도 빨갛게 물들어갔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면 속의 두 남녀는 서로를 더욱 거칠게 끌어안고 있었다. 달아오른 얼굴로 눈동자를 어지럽게 굴리는 병춘이에게 천천히 손님이 다가왔다. 직접 몸을 날려서라도 TV를 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손님이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병춘이에게 지폐를 내밀었다.
“던힐 라이트 한 갑 주세요.”
“이, 이천 오백 원입니다! 아, 안녕히 가십시오!”
두툼한 덩치에 시커먼 얼굴. 누가 봐도 야동마니아로 볼 법한 병춘이었다. 그런 병춘이다 보니 좀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무난하게 첫 월급을 타게 되었다. 병춘이는 역시나 이것도 뭔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했다. 게으르고 무관심한 걸로 따져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병춘이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야동마니아란 오해를 견디는 것, 잠을 견디는 것, 두 가지 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었다. 게다가 아직 뭔가를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일을 시작한 지 이미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전역을 하고 어느새 두 달이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군부대에서는 달력에 표시까지 하면서 기다려도 가지 않던 시간이 피부로 느껴보기도 전에 앞질러 달아나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하루. 그 속도가 점점 팽창하고 있었다. 새로이 건전지를 교체한 리모컨도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채널을 넘겨주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러면서도 유용한 정보들은 자연스레 습득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번 꼴로 오는 단골손님들 익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매일 아스피린을 한 통씩 사가는 특이한 여자 꼬마도 있었고, 늘 소주를 한 병씩 사가는 중년 남성과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고서 학원으로 떠나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게다가 주로 소비되는 상품의 성격들도 알게 되었다. 여성들이 주로 소비하는 생리대가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도 알게 되었으며, 적어도 이 편의점에서 팔리는 콘돔들 중에선 어떤 것이 가격대 성능비로 고객들을 만족시키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뭣보다 도움이 되었던 건 케이블방송의 시간표를 꿰차게 되었다는 것과 채널 이름만 다를 뿐이지 한 번 방송되었던 영화가 몇 번이고 다시 방송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영화의 제목들을 외우는 것은 기본이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이름과 심지어 대사까지 외울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말 그대로 ‘어느 날’이라고 표현하기에 딱 좋을, 그런 사소한 사건이 하나 있었던 날이었다. 그날도 병춘이는 영화를 틀어놓고 있었다. 영화는 <두사부일체>였다. 전국 330만 관객을 돌파했었다는 사실에 비해 영화의 전개 과정은 어눌했다. 학교 교육의 비리를 고발해보자는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한번 웃고 말자는 것인지 영화는 어지럽게 카메라를 돌리다 결국, 신파적 감성의 눈물을 강요하는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병춘이의 기억에 남는 건 두목이 부하를 구타하고, 선생이 학생을 구타하고, 다시 조폭이 선생을 구타하려다 조폭과 조폭이 엉키어서 구르는 장면들뿐이었다. 병춘이의 턱을 비틀며 하품이 터져 나왔다.
역시, 케이블이란, 그렇고 그렇군.
그 때였다. 현실의 볼륨이 커졌다. 영화에서 듣던 효과음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지금 당장 말로 표현하자면 우당탕쿵탕 정도지만, 분명히 병춘이가 몸을 일으키게 된 건 어디까지나 그 자극적인 음향효과 때문이었다. 문밖에는 간이용 테이블과 엎질러진 의자, 깨진 술병들이 한 눈에 보아도 8㎜카메라로 한 컷에 잡아내기 딱 좋은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주변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액션(action)신호가 되어주었다. 깨진 술병의 파편들로 범벅이 된 땅바닥에서 머리를 감싼 청년이 몸을 천천히 비틀어 꼬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꼭 불판 위에 갓 올려진 주꾸미 같다. 비비 꼬며 겨우 엎질러진 의자를 버팀목으로 삼아 일어서려는데, 다른 청년이 다가와 그를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청년과 몇 번의 발길질을 되돌려주는 청년. 눈짐작으로만 봐도 둘 모두 웬만한 액션배우들보다 훨씬 거칠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씨발, 그게 어디 선배한테 할 소리야? 엉? 너, 미쳤어? 개새끼, 개념을 상실해도 정도가 있지. 뭐? 다시 말해 봐. 다시 말해 봐, 이 개새끼야!”
말이 한마디씩 튀어나올 때마다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후렸고, 그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발길질과 주먹질도 아끼지 않았다. 구타를 당하는 상대는 그저 머리를 감싸고 있을 따름이었다. 방금 전까지 봤었던 <두사부일체>의 한 장면이 병춘이의 눈앞에서 오버랩 되었다. 두목 정준호가 부하 정운택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던 구타.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라하고, 혁대를 풀어 때리던 그 모습. 곧이어 주변에 피가 튀었다. 때리는 이의 주먹에도 피가 맺혔고, 맞는 이도 정확히 어딘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핏자국이 어지럽게 튀어있었다. 때리는 이도 지치고, 맞는 이도 지쳤다.
이제 끝난 건가?
병춘이는 슬며시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 씨발, 쪽팔리게…. 일어나, 이 새끼야. 한 동안 내 눈에 띄지 마라. 알겠냐? 어? 알겠어?”
피범벅이 된 상대를 일으켜 세워선 거기에다 대고 또 뺨을 툭툭 쳤다.
“…예.”
바람이 빠지는 듯한 목소리. 정말 뭐가 빠져나가버렸던 것일까? 피떡이 된 청년은 거꾸러졌고, 다음 순간 그 많던 구경꾼들은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병춘이는 잠시 한동안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편의점 불빛이 닿지 않는 경계의 저편에서는 발정이 난 길고양이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병춘이는 빗자루를 손에 들고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도블록에 쏟아진 핏자국은 주변에 함께 흩어져 있는 술들로 인해 애써 의식하지 않는 이상에야 단순히 검은 얼룩정도로만 보였다. 그때, 병춘이는 점장도 눈치 못 챌 정도라는 사실에 잠시 안도했었지만, 곧이어 일정에도 없던 청소를 하고 있자니 울화가 확 솟구쳐 올랐다.
“니미럴, 개새끼들! 지랄도 풍년이지 씨발. 왜 하필 여기서 술을 마시고서는 지랄들이야, 지랄이. 아, 씨발. 이걸 또 나 혼자 언제 다 치워!”
다행히 근무교대는 별 탈 없이 이루어졌다. 예상대로 점장은 소란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했고, 그 이후로 손님도 없었다. 덕분에 병춘이는 엉뚱하게도 전단지에 적혀 있던 ‘군필자우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손님이 편의점에 들어선다. 필요한 물건을 고른다. 계산대로 가지고 온다. 이걸 다 손님이 직접 처리한다. 알바생은 그저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고, 컴퓨터가 계산해주는 대로 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주는 게 전부다. 참, 간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간단한 일에 왜 군대를 다녀온 자가 우선권을 얻는 것일까? 혹시, 이 일이 지루해서일까? 케이블TV채널만 돌리고 있어야 하는 이 일이 못 견딜 만큼 지루해서 일을 하다말고 도망칠까 싶은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혹시 광고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생략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루가 열흘 같았던 2년여의 나날들을 훌륭히 버티어 낸) 군필자우대.
아니면, 단순히 밤에 일을 하기 때문에 군필자를 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4시간 온종일 매장이 오픈되어 있다보면, 백열전구에 대한 대처법을 익힌 귀신들이 어느 순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아니, 손님도 아르바이트생도 모르게 침입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군필자우대보다는 해병대전우회우대가 더 좋지 않았을까?
(귀신 잡는 해병 및 강원도 최전방 수색대 출신의) 군필자우대.
어떤 비상상황들이라고 해봤자 결국, 빨간 버튼이 대신해주는 게 아닌가? 병춘이는 이유가 궁금해지니 집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길고양이들의 낑낑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끼가 어미를 잃었나? 아니, 이건 두 연놈이 짝을 짓는 소린가? 아니, 먹을 거 앞에서 서로 물어뜯는 소린가? 아님, 누군가 또 고양이들에게 분풀이라도 하나? 병춘이의 머릿속이 어지럽거나 말거나, 길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터놓은 길을 따라 어느새 방 안쪽까지 해가 쫓아 들어오고 있었다. 병춘은 일어나 커튼을 치는 것도 귀찮아 그저 돌아누워 애써 잠을 청할 뿐이었다.
4.
그리고 별일이 없었다, 한 동안은. 길고 긴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까지 병춘이의 일상은 제자리였다. 컵라면의 일일 매출액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창고의 재고가 모자라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는다거나 하는 건 어디까지나 드라마 연속극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디지털화된 계산대는 오차를 몰랐고, 재고는 늘 빵빵했다. 병춘이의 상상 속에서나 몇 차례의 소동이 있었을 뿐, 병춘이의 하루는 바코드를 찍어 제품의 가격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단조로웠다. 그러나 장마를 알리며 찾아든 빗방울은 출근길의 편의점을 생경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늘 아래 놓인 곳은 어디 한군데 빠진 곳 없이 골고루 비에 젖어 음산한 거리.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못해 전혀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장마는, 당장이라도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질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근무교대를 마친 병춘이가 평소랑 달리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탓에 입구에 우산꽂이를 두었다는 것, 덕분에 바닥이 지저분하다는 것 외에는 다행히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진열장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새삼 앞 시간대 근무자의 상냥함에 병춘이의 입 꼬리가 잠시 살짝 올라가기도 했다. 딩동, 드르르륵. 금전등록기도 정상 작동을 했고, 함에는 잔돈도 넉넉했다. 삐, 삐. 그래도 여전히 뭔가 불안한 마음에 병춘이는 아무 담뱃갑이나 뽑아서 집어 들고 바코드기기를 찍어봤지만, 그것도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이 잘 되었다. 삐리리리.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입구의 차임벨이 선명하게 울리며 손님이 들어섰다.
첫손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병춘이는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손님은 늘 하루에 한 번씩 출근도장을 찍어주던 꼬마 여자아이였다. 분명 자신의 발 사이즈보다 커 보이는 핑크빛 장화를 신고 있었다. 아장아장. 아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병춘이의 마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여덟 살? 아홉 살?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묶은 굵은 방울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아이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지나가리라. 진열대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 아이가 편의점 천장 모서리에 설치된 반사경 안에서 다시 나타났다. 부스럭, 아스피린을 집어 들고. 부스럭, 참치 캔을 집어 들려고 까치발을 꼿꼿하게 세우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병춘이는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가엾기까지 했다. 고작 날씨 탓에, 괜한 불안함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총총총, 계산을 치른 아이는 편의점에 들어설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래, 뭐, 또 TV나 보자.
병춘이가 곧장 습관대로 리모컨을 들어 케이블TV의 채널을 돌렸다. 한 동안 몇 편의 광고가 채널과 채널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였고, 결국 채널은 다시 영화 채널에서 고정되었다. 천둥번개가 지나쳤다. 편의점의 문이 열리고, 차임벨과 함께 긴 생머리에 비에 젖은 두 여고생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병춘이는 신음하듯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지만, 눈은 TV화면에 고정을 시켜둔 채였다. 화면은 병춘이의 눈동자만큼이나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군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였다. 고통의 찬 신음소리가 귀로 파고들었고, 손과 발을 잃은 군인들이 몸뚱이로 기어 다니다 머리통에 총알이 박혀 쓰러졌다.
“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또 하네?”
“씨발, 케이블에선 늘 했던 것 밖에 안한다니깐. 하여튼 좆나 구려. 결국엔, 학생들도 돈 좆나리 써서 극장엘 가야한다 이거지.”
“씨발년아, 말 좀 곱게 써. 저기 알바가 다 듣고 있잖아, 쪽팔리게.”
“후훗, 저 알바 있지….”
속닥거리는 소리가 전쟁터의 총알소리와 폭음 위로 재빠르게 지나쳐갔다. 곧이어 키득거림이 이어졌다. 병춘이가 눈을 돌려 여고생들의 얼굴을 봤다. 제기랄.
“던힐 라이트 한 갑 주세요.”
“…미성년자에겐 판매할 수가 없습니다.”
에로영화채널 앞에서 마주쳤었던 그 여자 손님이었다. 아니, 그 여고생이었다. 건전지의 숨이 뚝 끊어졌었던 그날처럼, 병춘이의 얼굴이 또 붉어졌다. 화면에서는 톰 행크스가 빗발치는 총알들 사이에서 약진을 시도하고 있었고, 수류탄이 날아들고 있었다. 화면이 거칠게 흔들렸고, 또다시 몇 명의 군인들이 죽어나갔다.
“에이, 씨발. 저번에는 팔았잖아요? 꼰대처럼 왜 또 깐깐하게 굴려고 들어요? 짜증나게 하지 말고 그냥 팔아. 아니면, 내가 우리 반 애들한테 여기 편의점 알바는 야간마다 에로영화 보면서 탁, 탁, 탁 한다고 소문이라도 내줄까?”
이 여고생과 마주친다고 그렇게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일까? 병춘이는 일부러 여고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채널을 돌렸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나왔다. 여전히 화면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고, 이번에는 톰 행크스가 아닌 원빈이 약진을 시도하고 있었다. 저 영화가 전국 1,000만 관객을 돌파했었던가? 1,000만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어진 장동건이 휘두르는 기관총에 1,000명은 족히 죽어나가고 있는 듯 했다.
“아아, 답답해, 씨발. 안 팔아? 안 팔 거야? 왜 사람이 말하는데, 쌩을 까? 알바 주제에 좆나 꼰대같이 굴고 있네! 변태, 색마 주제에. 두고 봐. 탁, 탁, 탁.”
결국, 병춘이는 담배를 내주었다. 두 여고생이 편의점을 나서며 또 키득거렸다. 아마 저희들끼리는 병춘이에게 가했던 ‘탁, 탁, 탁’의 협박이 먹혔다며 좋아하고 있을 터였다. 여고생들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렸다. 그때부터 창을 타고 빗물이 흐르듯이 시간이 유연하면서도, 그 흐름에 끈적임을 두며, 흘러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이르렀다. 또, 몇 편의 에로영화가 잽싸게 지나쳐갔다. 또, 낯익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양아치 같은 4인조가 다짜고짜 주유소에 쳐들어가서 주유소 사장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었다. 병춘이가 햇수로 5년 전에 봤었던 영화였지만, 욕설을 남발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주인공들의 대략적인 이미지는 확실히 기억에 남아있었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다시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돌아오기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영화가 십여 편이 지나쳤고, 재방송되던 대여섯 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역시, 케이블이란, 그렇고 그랬다. 볼만한 것이 없을 땐, 코믹액션이 그나마 봐줄만 하다.
화면에서는 이성재가 주유소에 현금이 없는 것이 말이 되냐며, 주유소 사장 박영규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때, 편의점의 문이 열리고 고삐리 4명이 들어섰다. 비바람에 섞여 소주냄새가 밀려왔다. 비릿한 빗물과 알싸한 소주의 향이 숨죽이고 있던 병춘이의 불안함을 다급하게 깨우기 시작했다. 교복을 추스르며 편의점 안을 활보하던 그들이 컵라면을 골라서 카운터로 다가섰다. 묘한 긴장감이 병춘이의 몸에 스며들었다. 술에 취한 그들이 저마다의 손에 컵라면을 쥐고 병춘이 앞에 말없이 일렬로 늘어섰다. 다행이었다. 술을 더 마시려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이제 조용히 계산을 치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바코드를 들어 컵라면에 찍으며, 병춘이는 그들에게 똑같이 나무젓가락을 하나씩 주었고, 줄을 선 차례대로 계산을 치러주었다. 화면에서는 다시 이성재가 현금을 구하기 위해 주유소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기름을 무조건 만땅으로 주유하고 있었다. 언제 주인공들이 정체를 들킬게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균열을 맞닥뜨린 것은 화면 속 4명의 주인공들이 아닌 화면 밖의 4명이었다. 제기랄.
온수기에 물이 모자랐다.
5.
상식적으로, 온수기에 물이 모자랄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들은 술에 만취해 다른 무엇보다 컵라면의 뜨거운 국물 하나만을 절실히 갈망하는 청춘의 끓는 피들이었다. 무서운 십대다. 그걸 잊어서는 곤란하다. 그 위기의 순간에, 그나마 병춘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준 건 물이 순번대로 돌아가다가 마지막 한 명에게만 부족했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4명 중 1명이라니! 그렇지만, 그런 얄팍한 기대도 녀석이 바닥에 멀쩡한 라면을 내팽개치면서 일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 씨발! 저 알바 개새끼, 물도 안 채워뒀어!”
뭐? 개새끼? 저 씨발새끼 좀 봐라?
고삐리의 욕설에 반사적으로 이마의 핏줄이 꿈틀거렸지만, 병춘이의 시선은 고삐리의 입이 아니라, 고삐리가 딛고 서 있는 바닥에 가서 박혔다. 비가 내리고 있는 탓에 바닥은 온통 시커먼 발자국들로 덮여있었다. 덕분에 바닥에서 부서져 사방으로 튀어버린 하얀 라면 부스러기는 더욱 하얗게 보였고, 빨간 스프가루는 더욱 빨갛게 보였다.
씨발, 좆나 지저분해졌네!
화면에서는 강성진과 유지태가 주유하던 차의 남녀를 트렁크에 구겨 넣고 있었다. 여자가 신고하겠다고 소리를 지른 대가였다. 씨발, 저걸 또 언제 치우지? 잠깐, 근데, 뭐? 저 어린노무 호로새끼가 뚫린 아가리라고 막 씨부리네? 카운터 밑에 있는 빨간 단추가 떠올랐다. 물을 받지 못한 고삐리가 다짜고짜 저돌적으로 전진해왔다. 눈앞에서 점장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상황이 좀 거시기하다 싶으면 여기 야구 배트 보이지? 그냥, 갈겨버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던 병춘이의 근육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손이 자연스럽게 야구 배트를 거머쥐었다. 턱수염이 부슬부슬한 점장의 무표정한 얼굴이 머릿속에서 클로즈업 되었다.
그냥, 갈겨버려.
뛰어들려는 고삐리와 몽둥이를 움켜진 병춘. 그 찰나의 간극을 가르며, 삐리리리, 입구의 차임벨이 우렁차게 울렸다. 동작을 멈춘 그들을 내려다보며 새로운 손님이 2명 더 편의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이 마흔에서 오십 줄쯤으로 보이는 두툼한 덩치의 아저씨들이었다. 병춘이는 몸에서 힘을 빼고, 배트를 놓았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면, 눈앞의 고삐리들보다 술 냄새가 더 역하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시끄러운 화면에서는 주인공들이 점령한 주유소에 또 다른 양아치들이 들이닥쳐 시비를 걸고 있었다. 양아치들은 주유소 아르바이트생 중 정준을 찾고 있었고, 주인공들에겐 천연덕스럽게 욕을 내뱉었다. 아, 이 새끼들. 머리 색깔하고는… 유지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삐리와 어른들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두 명의 어른들이 뒤돌아서서 얼굴에 무엇인가를 뒤집어썼다. 모르긴 몰라도 새롭게 등장한 그들의 복장에 대해 사람들은 ‘복면’이라고 표현하는 걸로 안다. 얼굴에 뒤집어 쓴 것이 스타킹이든, 양말이든, 통이 큰 비니모자든 종류를 상관하지 않고 뒤집어썼다는 사실이 우선 중요한 것이라면, 그들은 확실히 복면을 썼다. 그것도 2명이.
“뭐야, 이 핏덩이들은? 다들 정렬하고, 어서 돈 있는 거 다 꺼내!”
2인조 복면강도들의 품에서 칼과 쇠몽둥이가 튀어나왔다. 병춘이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고삐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면에서는 유오성이 박영규에게 대가리박아를 강요하고 있었다. 만세를 부른 자세로 뒷걸음질을 치는 병춘이와는 달리, 만취한 고삐리는 여전히 당당했다.
“이 양아치 새끼들, 생긴 건 멀쩡하게들 생겨서 어디서 강도질이야, 강도질은! 씨발, 너넨 집구석에 마누라도 없냐? 애도 없어? 니기미, 막말로 늙어 문지방에 똥칠하는 부모도 없냐? 왜 야밤에 이 지랄이야, 지랄이!”
“지, 지, 지랄! 이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죽고 싶어! 엉?”
역시, 무서운 십대다. 아무려면 어떨까? 그중에서도 뜨거운 물을 받지 못했던 녀석이 가장 용감했다. 눈에 쌍심지를 켠 것도 모자라 고개를 바짝 쳐들고 복면들에게로 다가서려 했다. 복면의 한 발이 먼저 앞서고, 뒤이어 칼이 한 차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래도 뜨거운 물을 받지 못했던 녀석은 여전히 용감했다.
“칼? 씨바, 칼 넣어봐, 넣어봐 이 새끼야! 배짱도 없는 쉐이가 어디서 구다잡고 지랄이야. 씨발, 개새끼! 야! 여기야, 여기! 여기다가 칼 넣어봐, 넣어봐, 이 새끼야! 못 넣기만 해봐, 개새끼, 넌 깜빵 보내기 전에 내 손에 뒈질 줄 알아!”
또 다른 복면의 한 발이 앞서고 쇠몽둥이가 한 차례 춤을 추었다. 우당탕쿵탕. 엎질러지는 소리에 새우깡, 양파링, 고래밥, 자일리톨껌이 바닥으로 일제히 다이빙을 했다. 지켜보던 병춘이가 아플 텐데,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쇠파이프를 휘두르다 말고 사람의 정수리가 아닌 철제로 된 가판대를 후려친 복면의 손목이 걱정되어서였다.
“이런 미친 호로새끼!”
그것이 액션(action)신호였다. 고삐리 4인조가 동시에 몸을 날려 복면강도 2인조에게 달려들었다. 편의점은 일순간 난장판이 되었다. 칼을 피하고 쇠몽둥이를 몸으로 막으며 고삐리들의 팔다리가 복면들의 급소로 파고 들어갔다. 어느 순간 저만치로 나가떨어진 칼과 쇠몽둥이. 그때부터 사정없이 복면 위로 쏟아지던 주먹 끝에서 물기를 먹어 질퍽한 솜뭉치를 치는 느낌의 소리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복면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고삐리들이 주먹을 거두고 발길질을 가했다. 쓰러진 복면들을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사방위로 둘러싼 고삐리들이 공놀이를 하듯이 발길질로 복면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일방적인 폭행, 그것도 멈추지 않는 폭행 속에서 고삐리들의 발길질이 서서히 무디어졌다. 그리고 그 무디어지는 발길질을 따라서 현실이 권태로운 B급 학원 액션물처럼 무표정하게 클로즈업 되는 것 같았다. 그때, 4인조 가운데 가장 용감했었던 한 명이 장면연출의 마무리를 위해 멀리 치워버렸었던 쇠몽둥이를 찾아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제대로 웅크려있지도 못하는 마흔 줄의 두 명을 복날의 개처럼 혓바닥을 빼어 물때까지 사정없이 내리쳤다. 한 차례 호흡을 흐트러트리는 천둥번개가 쾅, 광분한 녀석의 몽둥이질에 결국 뻑,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고 뒤를 이어 헉, 하고 바람이 새어나오는 듯한 신음소리가 났다.
갈비뼈라도 부러졌나? 씨발, 역시 쪽수가 후덜덜하네!
화면에서도 주인공들에게 시비를 걸던 양아치들이 혼쭐이 나고 있었다. 결국, 그들도 박영규처럼 바닥에 대가리를 박았다.
6.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도 끝이 났다. 편의점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건달 4인조였고, 그들은 순전히 병춘이의 시급으로 장만된 새로운 컵라면을 받아들고 웃어보였다. 복면강도 2인조는 건달 4인조들이 뜨거운 라면 국물을 호호 불어가면서 먹고 있을 때, 손발이 묶인 채 암담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저씨들, 정말 집에 누구 없어요? 왜 이러고 돌아다녀요?”
“….”
“여기 편의점에 과산화수소랑 연고 같은 것도 팔아요?”
“네, 저기 잡화코너에 있어요.”
“몇 개 계산해 주세요. 보니깐 이 아저씨들도 술김에 실수하신 것 같은데, 제가 연고랑 좀 발라드릴게요. 그리고 이 아저씨들 이따가 날 밝아지면 그냥 풀어주세요. 그런데 혹시… 신고하셨어요?”
“아, 신고는 아직….”
“잘 하셨어요. 신고는 하지 마시고요. 연장은 우리가 챙기고 가다가 알아서 잘 버릴게요.”
“뭐,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조금 전과는 너무 다른 태도였다. 사람은 오래두고 봐야 안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알고 보니 이토록 친절한 학생이 아닌가? 뭣보다 역시, 뜨거운 라면 국물이 들어가니 온순해졌다.
“아저씨, 그러게 동네 편의점 같은 걸 털 생각이나 하셔서 되겠어요? 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에이, 쯧, 조금만 더 이렇게 계시다가 날 밝으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세요. 네? 여기 편의점 알바하시는 분이 얼마나 긴장했겠어요? 얼굴 이리 돌려봐요. 연고 좀 바르게.”
컵라면을 다 먹은 고삐리들이 저마다 입에 담배를 한 개비씩 빼물었다. 복면이 벗겨진 복면강도 2인조들은 여전히 손발이 묶인 채 한쪽 구석에서 역한 소주냄새와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고삐리들이 팔자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섰다. 차임벨과 함께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병춘이는 청소를 시작했다. 씨발, 이걸 또 언제 다 치우나? 아, 좆같네. 다행히 공병부대 출신의 병춘이는 손쉽게 구부러진 철제 가판대를 손볼 수 있었다. 아, 군필자 우대는 이런 경우를 위해서였나? 어지럽게 튄 핏자국들을 보니 병춘이의 입에서 다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좆같네, 좆같아. 걸레를 빨아와서 구석구석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걸레질을 할 때마다 병춘이의 입도 걸레가 되었다. 씨팔. 개새끼들. 애고 어른이고, 니미럴 것들. 술 쳐 마셨으면, 집에 곱게 들어가서 쳐 주무시기나 할 것이지. 개 같은 것들. 그렇게 쉬지 않고 욕을, 욕을 하고나니 핏자국은 말끔히 지워졌다. 그러는 사이에 또 한편의 영화가 끝났고,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신기하게도 그 난리블루스를 치르는 동안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들어오려던 손님들이 주먹질에 얼굴이 죄다 이지러진 아저씨들을 보고 놀라서 발길을 돌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새 비가 그쳤다. 점장이 오려면 이제 삼십 여분도 채 남지 않았다. 병춘이는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 아저씨들에게로 다가갔다.
“니이미이, 씨이파아알….”
갈비뼈가 부러진 탓인지 아님, 너무 맞아서 혀뿌리라도 상했는지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어나오듯 말이 새어나왔다. 병춘이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그냥 다 꺼져주었으면. 말없이 재빠르게 끈을 풀어주고 카운터로 돌아와 채널을 돌렸다. 장동건이 비에 젖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한 쪽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아저씨들의 눈빛과 너무나 닮았다. 장동건의 명연기였다. 스스로의 몸도 버거워 보이는 아저씨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이미이, 씨이파아알….”
청명한 차임벨에 아저씨들의 욕지거리가 잘려져 나갔다. 어느새 떠오른 해를 등지고 선 점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저씨들이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6-1.
병춘이의 발걸음에 힘이 없다. 30미터도 채 되지 않는 퇴근길이 지구 3바퀴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간밤의 난리통에 긴장감을 쥐어짰었던 탓인지 어깨마저 축 처져있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민물로 건져진 오징어다. 흐느적흐느적. 다행히 출근길에 챙겨 나왔던 우산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아침을 맞이했다. 우유배달, 신문배달이 병춘이를 지나쳐갔고, 그럴 때마다 골목을 누비던 길고양이들이 눈치를 살피며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길고양이들의 그 묘한 움직임은 병춘의 집 앞 골목에 이를 때까지 이어졌다. 병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뚝.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하늘 위로 새 한 마리 날아가지 않았고, 땅 위로는 사람은커녕 방금 전까지 쫓아오던 길고양이들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절대적 적막만이 아침햇살에 말라가고 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던 병춘이도 뭔가 께름칙한 기분에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해가 떠올라서 어디에도 어둠은 머물 수 없었다. 사위가 명확히 보였다. 적나라하게. 맞은편 전봇대 옆에 대여섯 마리의 길고양이가 죽어있었다. 병춘은 조심스럽게 그 시체더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메라가 클로즈업 되듯이 병춘의 눈에 모든 정황들이 점점 더 세밀하게 들어왔다.
최후에는 서로를 물어뜯었나 보다. 고양이들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하얀 거품들과 서로의 털 뭉치가 말라붙어 있었다. 발톱에도 털들이 끼어 있었고, 저마다 한 움큼씩 털이 뽑혀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그런 사사로운 다툼이 아니었다. 죽은 고양이들의 머리맡에는 낯익은 참치 캔과 아스피린 통이 있었다. 털썩. 순간 다리가 풀려버린 병춘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전히 주변은 고요했고, 비에 젖었던 고양이 시체들이 말라가며 역한 냄새만을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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